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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 이념·실천·비판의 역사

by 브로핏 2025. 9. 2.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사상가 톰마소 캄파넬라도 16세기에 '감각철학'과 '형이상학' 등을 통해 기존 서방교회의 신학 전통을 거스르는 합리주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스페인 지역에서 노예와 농노를 포함한 모든 계급과 착취를 철폐한 이상적 신정국가 건설 운동에 가담하다가 발각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되고 27년간 옥고를 치른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이상 사회상은 모든 것이 계획되고 균등하며, 철인이 궁극적 선에 이르기 전까지 사회를 통제하는 공산제적 체제였다. 전근대적 공산주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절대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적 미래상은 인류가 보편적 이성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경제·정치 구조 속에서 구체적으로 제도화하는 이상주의와 결부되었다. 이는 훗날 마르크스가 헤겔의 절대정신 사상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계승한 것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라인홀트 니부어나 이사야 벌린 같은 공산주의 비판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 소비에트 연방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소수 혁명가에 의한 독재, 인간 욕구의 억압과 통제, 단일한 철학의 강요 등이 우연히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토브, 코와코프스키, 아감벤, 바디우와 같은 유럽 철학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의 기원이 현실 변혁과 실천을 강조하는 존재론적 기반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공산주의는 일찍부터 유럽에서 기독교에 맞서는 '피조물의 사상'으로 인식되었으며, 그 결과 서구권에서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상당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현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사회주의는 흔히 '공산주의의 하위 단계'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각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회주의의 본질로 규정한 이후부터 형성된 것이다. 레닌의 규정 이전에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주로 경제적 영역에서 평등과 분배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여러 사회운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공산주의는 경제적 영역에서 사유 재산제를 근본적으로 폐지하고, 문화 ·사회·정치 등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제도를 전면적으로 변혁하려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의미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의사를 전제로 협동 경제를 구축하고 사회적 모순을 공동체적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이념으로 정착하였다. 반대로 공산주의는 기존 사회 질서를 철저히 전복해야 한다는 전제를 두었으며, 사회 개혁은 혁명 세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실행 방식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정치철학적 차원에서 보면, 사회주의는 초기 자유주의 사상의 성과를 흡수하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정치철학적 논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자유주의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다양한 형이상학적 담론을 활용하여 독자적인 정치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 같은 성격 차이로 인해 사회주의는 기존 질서 안에서 종교적 명망가나 진보적 사회운동가들이 분배 정의를 추구하는 실천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는 기존 전통을 파괴하고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반국가적 ·반그리스도교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고,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었던 유럽 사회에서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스크와 엥겔스는 당시 공산주의라는 개념이 가진 이러한 급진적 성격을 주목했고, 자신들의 사상이 사회주의보다는 공산주의라는 이름에 더 적합하다고 인식하였다. 특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원리'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지닌 기회주의적 태도와 온건성을 비판하며, 그러한 특성이 제거되어야만 사회주의자와 구분되는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후 레닌의 견해가 더해지면서 공산주의는 점차 사회주의의 한 범주로 포섭된 사상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일반적인 통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 영역에서 최초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맹아를 형성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혁명은 개혁 성향의 귀족과 부르주아, 그리고 도시 빈민이 결합한 혁명적 연합을 통해 전개되었다. 당시 혁명의 주도 세력이었던 자코뱅 좌익, 즉 앙라제 내부에서 공산주의적 발상이 최초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앙라제는 여성 해방 문제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한 몽타뉴파를 비판했으며, 반동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상시적 비밀경찰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부르주아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했고,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앙라제의 목표가 곧바로 사유재산 자체의 전면적 폐지에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실천은 공산주의 운동의 외형적 특징을 상당 부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몽타뉴파는 앙라제가 권력 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고 지도자 자크 루를 체포하였다. 루가 투옥 중 자결하면서 앙라제는 지도력을 상실하고 급격히 와해되었다. 이어진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몽타뉴파 역시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여 극소수의 정치 세력만 남게 되었다. 그 공백 속에서 앙라제의 이념을 계승한 인물이 바로 공산주의자 그라쿠스 바뵈프였다. 그는 테르미도르 체제에 맞서 저항했지만, 결국 처형당하며 생을 마쳤다. 이후 바뵈프의 사상을 물려받은 급진적 지식인들은 인민을 철저히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기존 체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