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는 자신 이전의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관념적 사회주의와 자신의 사상을 명확히 구분하였으며, 이를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또한 그는 자신을 단순히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생산겱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역사 발전을 이끄는 핵심적 동력이라는 사적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노동의 의식적 성격을 분석하며, 이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상계와 절대계를 구분하되, 현상 없는 절대는 존재하지 않고 절대 없는 현상도 있을 수 없다는 실천적 논리를 통해 기존의 형이상학적 교조주의와 자신의 철학을 구별하였다. 즉, 본질을 향한 인간의 의식적 실천을 곧 '노동'으로 규정한 것이다. 노동은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가장 고도의 추상적 활동이자 의식적 행위로서,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해방적 힘을 지닌 창조적 실천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노동은 생산력의 제약 속에서 형성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온전히 발현되지 못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예제 사회에서 노동은 강제된 노예노동으로, 봉건제에서는 제한된 소생산 행위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단순히 노동력의 산출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이 자유로운 의식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장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해소된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보았다. 또한 인류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투쟁해 왔으며, 이를 '계급 투쟁'이라 정의하였다. 계급 투쟁은 곧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 기존 생산관계를 혁명적으로 타파하고, 더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형성하는 실천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 역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고 보았으며, 자신이 살던 시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이 단순히 노동력으로 환원되는, 곧 노동이 본래 의미에서 열화된 형대로 작동하는 체제로 분석하였다. 1920년 파벨 쥬코프가 촬영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진이 전해진다. 그는 기존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현실적 조건에 맞게 발전시켰다. 카를 마르크스는 1845년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청년 헤겔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공허함을 비판하고,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도래할 사회를 논하였다. 이어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는 이를 '공산주의'라 명명하였다. 이 시점부터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공산주의는 일반적으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복된 사회'를 뜻하게 된다. 다만 이러한 개념은 헤겔(1770-1831)의 '절대정신'과 유사한 이상적 상태로 간주되었고, 현실적 맥락에서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논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청산하는 과도기적 시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상정하였으며, 이를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와의 투쟁에서 최고조의 열기를 경험하고, 동시에 승리가 확정되는 시기'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를 띠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제시하지 않았으며, 이 점은 이후 수많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레닌은 이러한 논쟁의 장에 참여하여,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도기적 단계에서 어떠한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지를 제시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치열하게 논쟁하였고, 여기서 형성된 이론과 테제는 훗날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1917년 혁명과 그 후속 과정에서 보완된 사상은 스탈린에 의해 계승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정립되었다. 스탈린은 또한 레닌의 철학적 저작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정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하의 속류 유물론적 경향을 비판하는 동시에, 경험주의적 유물론과 기계적 유물론을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을 정립하려는 레닌의 의도에서 집필된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를 토대로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계승하여 'DIAMAT' 교리를 구축하였고, 마르크스주의의 유심주의적·기계주의적·기회주의적 해석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레닌주의는 현실 정치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민족자결론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세계 민족해방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독재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이는 직접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혁명적 독재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독특한 사회주의 정치체제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종교 문제에 급진적으로 개입하여 국가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엥겔스가 언급했던 지도자의 독점적 역할을 발전시켜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수령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레닌주의는 국민주권, 대의제, 법치주의를 기초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병렬적 위상을 지닌 사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혁명에 대한 입장에서도 레닌주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갈라졌다. 칼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해 붕괴하고,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대립이 최고조에 달할 때 '자발적 혁명'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공황이 이미 세계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여파가 러시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자본의 팽창으로 발생한 위기와 그 부정적 효과는 개별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단위로 파급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19세기 독일과 프랑스에서 발생한 공황과 그로 인한 주변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혼란을 사례로 제시하였으며, 혁명의 실패는 노동자 세력의 분열이나 국가 권력의 강력한 탄압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아울러 마르크스가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 제도화를 설계하였고, 이 점에서 레닌주의는 공산주의 사회로의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행을 추구하였다. 결국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레닌주의의 이론적·실천적 기반을 계승한 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