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1924년에 사망하기 1년 전인 1923년부터 러시아 공산당 내부에서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 권력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6년 당내 파벌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잔존 세력들을 축출하거나 제명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는 1928년부터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이후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시행된 경제 계획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계획의 목표는 기계·섬유·전기·화학 산업의 급속한 성장에 있었으며, 뒤이어 진행된 제2차·제3차 계획을 통해 1942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은 비약적인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그 결과, 소비에트는 후진적 농업국에서 강력한 공업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주요 공장지대가 심각하게 파괴되었지만, 전쟁 직후인 1950년에 추진된 복구 계획을 통해 소련은 빠른 속도로 산업 기반을 회복하여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였다. 서방의 자유민주 진영은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을 차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그 상징적인 사례가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로, 이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군사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국가들 중에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필리핀, 대한민국,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등지에서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강력한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들 정부는 반공산주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강화하는 동시에 국내의 진보적 사회운동 세력들을 국가 공권력으로 탄압하였다. 정치영역에서는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 노선이 확산되면서 진보 진영을 분열시키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났다. 미국 내에서도 반공주의는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950~60년대의 공산주의 탄압은 표면적으로는 간첩 색출과 공산주의자 추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뉴딜 정책에 연관된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무력화시키려는 미국 공화당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했다. 또한 CIA는 반공주의 지식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정치 문제를 비판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의 영향력을 크게 축소시켰다. 매카시즘 광풍은 1954년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으나, 그 후에도 미국 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억압은 지속되었고, 이는 지식인 사회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 성향의 인사들과 그 지지자들까지 탄압을 받았다. 출판계 역시 같은 분위기를 보였는데, 많은 출판사들이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진보적 저작들의 출간을 꺼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부 출판사들은 유럽 출판계와 협력하거나, 다른 곳에서 외면받은 작가들을 영입하여 미국 지식인 사회의 침체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랜덤하우스 계열의 판테온 출판사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P.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에릭 홉스봄과 E.H.카의 저작들, 그리고 유진 제노비스가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미국 노예제를 분석한 '노예제도의 정치경제학' 등을 출간하여 학문적 다양성을 이어갔다. 카를 마르크스가 등장한 이후, 공산주의는 서구 사회에서 형성된 민주주의 제도와 자유 보장의 가치를 단순히 거부하거나 파괴하기보다는, 변증법적 지양의 과정을 통해 유지하고 계승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상적 미래 사회를 공상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은 점차 배격되었고, 이론적으로도 설득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이르는 시기까지, 실제의 공산주의 운동은 오히려 미래 사회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인공적인 사회 계획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성격을 보였다.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생산자, 수호자, 철인이라는 세 계급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 국가의 청사진을 그려냈다. 그는 '국가' 제5권과 제8권에서 민주정이란 결국 개인의 억견에 기반한 정치 체제이므로, 필연적으로 불의가 발생하고 마침내는 무능하거나 잘못된 인물이 지배하는 참주정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철학적 식견과 지혜가 뛰어난 자를 선별해 수호자 계급으로 삼고, 그중에서 가장 우월한 자를 철인으로 하여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제5권에서는 재산, 주거, 토지를 완전히 국가 소유로 하고, 그에 따른 공유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급진적 구상을 드러냈다. 또한 자녀 양육조차 개인이 아닌 국가가 맡아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탈리아 철학자 톰마소 캄파넬라는 '형이상학'에서 '선의 이데아'가 세상을 선하게 만드는 경로를 탐구했고, 그 사유의 결실이 바로 공상적 저작 '태양의 나라'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육을 받았으나, 사상적 기반은 인본주의에 놓여 있었다. 캄파넬라는 '선의 이데아'를 부동의 일자(一者)로 규정했으며, 그것은 특정한 인격신의 형상을 갖지 않고 동시에 만유 자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일자의 합일성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당대 가톨릭 사회에서 금기시된 합리주의적 사유였기에, 그는 여러 차례 투옥을 겪어야 했다. 그는 '감각철학'과 '형이상학'에서 '선의 이데아'가 하강화를 통해 현실 세계 속에서 구체화된다고 보았다. 비록 그것이 본래의 순수한 선의 의도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인류에게는 충분히 선한 작용을 하며, 감각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전통적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는 급진적 견해였다. '태양의 나라'에서 캄파넬라는 이러한 철학을 구체적인 사회 제도로 옮겼는데, 첫째로 토지와 주거의 전면적 공유, 둘째로 교육과 의료의 완전한 무상 제공, 셋째로 국가가 자녀 교육과 출산을 규제하는 제도를 제시하였다. 또한 모든 인민은 노동권을 보장받으며, 하루 4시간(일요일 제외)의 노동만을 의무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이혼의 자유, 철인 집단제도의 수립, 토지 국유화, 생활재의 균일화, 농축산업의 기계화, 전쟁 포로의 인도적 처우, 국립 고아원의 설치 등 다채로운 이상을 제시하였다. 캄파넬라의 저작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자주 비교되었다. 그러나 모어가 노예제를 일정 부분 인정한 반면, 캄파넬라는 노예제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모어는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되 소유 자체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으나, 캄파넬라는 단일한 국가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외에도 두 사상가 간의 차이는 뚜렷하다. 모어가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의 유지에 무게를 두었던 반면, 캄파넬라는 가족 제도의 해체 가능성을 주장했다. 노동시간에 있어서도 모어는 6시간을, 캄파넬라는 4~5시간을 이상적이라 보았다. 또한 모어가 인격신 부정을 이유로 특정 집단을 추방하는 등 종교적 엄격성을 유지한 데 반해, 캄파넬라는 범신론적 사고를 전개하며 자연법칙 그 차제를 신과 동일시했다. 이에 따라 이성적 사고로 파악되는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모어는 기존 가톨릭 체제를 수호하는 선에서 개혁을 제안했지만, 캄파넬라는 사회 전반을 급진적으로 전환하려는 사상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독일의 공산주의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는 '태양의 나라'가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공산주의 이론 형성에 있어 필수적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과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역사학자들 역시 캄파넬라의 저작을 '공산주의 문화예술을 위한 기념비적 선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캄파넬라가 17세기 초 토마스 모어와 같은 사회주의적 사상가와는 달리, '프로토-공산주의자'로 규정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