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열강들은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러시아 제국 또한 세르비아와 맺은 동맹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 이후 연패를 이어가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장기간의 전쟁은 국민들에게 고통과 불만을 키웠고, 황제에 대한 존경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출신 황후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측근 라스푸틴에 대한 불신은 러시아 내부 불안을 가중시켰다. 결국 1917년 3월 8일, 전시 고통에 시달리던 농민, 부르주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혁명을 일으켰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퇴위, 제국은 붕괴하였다. 혁명의 주축은 페트로그라드의 여성과 노동자들이었으며, 여기에 병사들이 가세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탄생했다. 민중이 봉기에 나선 직접적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한 극심한 생활고였다. 이 무렵 멘셰비키 의원들과 노동자 대표들은 1905년 혁명 당시와 유사한 소비에트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멘셰비키의 니콜라이 치헤이제가 의장이 되고, 사회혁명당 의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부의장으로 선출되면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출범했다. 집행위원 15명 가운데 급진적 볼셰비키는 단 2명에 불과했다. 2월 혁명으로 성립한 임시정부의 핵심은 사회혁명당 출신 두마 의원이자 소비에트 부의장이던 케렌스키였다. 그는 육군 장관을 겸직하며 평화를 원하던 병사들과 달리 전쟁 지속을 주장했다. 1917년 6월 16일(율리우스력), 그는 켈렌스키 공세를 개시하여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사앧로 갈리치아 전선을 공격했다. 초기 성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 저하로 전선은 붕괴되었고, 7월 2일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독일·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이어지며 러시아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8월에는 독일군의 리가 공세로 리가마저 상실했다. 전선 붕괴와 생활고는 농민과 노동자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7월 3일부터 7일, 볼셰비키가 주도한 7월 봉기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났다.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의 수병 2만 명이 무장을 하고 행진에 나섰으며,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동참해 사태는 확대되었다. 시가전 끝에 임시정부가 봉기를 진압했고, 이후 볼셰비키 지도부에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레닌과 지노비예 이후 8~9월에는 코르닐로프 사건이 발생했다. 임시정부군 총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은 혼란을 수습하려 강력한 군사권을 요구했으나, 케렌스키와 대립하면서 정변을 시도했다. 케렌스키는 그를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독재를 꾀한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볼셰비키에게 세력을 회복할 기회를 제공했고, 곧 다가올 10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표결 끝에 무장봉기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10월 12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공농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는 애초 멘셰비키가 제안한 방위 조직이었지만, 볼셰비키는 무장봉기를 위한 기구로 적극 활용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권력 장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를 숨기지 않는다."라고 연설하며 공개적으로 봉기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제2차 전국 소비에트 대회(10월 25일)에 맞춰 무장봉기를 단행하기로 했다. 위원회 구성은 볼셰비키 48명, 좌익 사회혁명당 14명, 무정부주의자 4명으로 이루어졌다. 곧 각지 군부대가 소비에트 지지 입장을 밝혔고, 임시정부 대신 소비에트 명령을 따르기 시작했다. 10월 23일, 에스토니아에서는 얀 안벨트가 탈린에서 무장봉기를 개시하였다. 10월 24일, 임시정부가 볼셰비키 신문사 인쇄소를 압수하자 공농혁명위원회는 즉각 무력 행동에 돌입했다. 볼셰비키 적위대는 거의 저항 없이 우체국, 발전소, 은행, 인쇄소 등 주요 거점을 장악했고, 마침내 10월 25일, 임시정부는 전복되었다.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혁명군을 이끄는 공농혁명위원회로 이양되었으며, 이는 곧 러시아 사회주의 정권의 성립을 의미했다.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한 뒤 1918년에는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919년 3월 2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했는데, 이 조직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불렸으며, 일반적으로는 약칭 코민테른이라 불렸다. 창립대회에는 30개국에서 파견된 35개 공산당이 참여했고, 대표단의 수는 총 52명이었다. 1920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대회에서 코민테른은 가맹 조건을 명확히 했다. 그 결과, 가맹을 희망하는 공산당은 반드시 21개 조항을 수용해야 했는데, 그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1. 노동 해방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불가피함을 인정한다. 2. 교조주의·수정주의·개량주의에 맞서 싸운다. 3.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불법적 조직을 준비한다. 4.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개량 가능성을 부정한다. 5.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원칙으로 당을 운영한다. 같은 해 9월 1일에는 '제1차 동양 인민 대회'를 통해 코민테른 극동서기국의 지위와 임무를 확립하였다. 이 회의에서 코민테른은 군벌 체제의 중국, 식민지 인도와 조선, 그리고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 투쟁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1922년에는 볼쎼비키가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되었다. 이후 1924년 6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 파시즘'으로 규정하며, 공산주의자들에게 사회민주주의 및 개량주의 세력과의 적극적인 투쟁을 요구하였다. 1928년 7월 17일 열린 제6차 대회에서는 식민지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 방침이 논의되었다. 이 방침은 1927년 2월 15일 '식민지 억압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국제회의'의 결의를 재검토한 것이었다. 대회는 중국의 군벌 체제, 식민지 조선과 인도, 그리고 일본의 사회 성격을 다시 정의하며 이들을 반봉건사회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당면 혁명의 성격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설정되었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혁명론이, 조선의 항일 세력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한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1935년 7월 25일에는 마지막 대회인 제7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코민테른은 '반파쇼 인민전선론'을 채택했다. 이 노선은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맞서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과도 연합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그에 따라 스페인 내전, 중국 혁명 전선, 만주와 조선의 항일 전선에서 새로운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면서 각국 혁명이 지역적·민족적 특성을 더 크게 띠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은 각국 혁명은 각국의 혁명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