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6월, 벨기에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이 조직한 브뤼셀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Communist Correspondence Committee of Brussels)와 영국의 기독교적 성향을 띤 사회주의 단체인 정의자동맹(League of the Just)이 합쳐져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이 출범하였다. 이 단체가 내세운 창립 선언문이 바로 잘 알려진 '공산당 선언'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의 회원들은 기존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의 기본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비인간적 속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는 보다 높은 사회적 발전 단계를 추구한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정의자동맹을 이끌던 빌헬름 바이틀링과 연락위원회 중심인물이었던 칼 마르크스 사이의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내부 분열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결국 1852년 동맹은 해산의 길은 걷게 된다. 1864년 9월28일,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중심으로 제1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으며, 정식 명칭으로는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이다. 당시 유럽 사회를 자본주의 단계를 규정하고 그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국제적 계급 투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가 집필한 발기문과 임시 규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 급진적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국가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진보세력이 모인 국제 조직이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치열한 노선 갈등이 벌어졌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마르크스는 프루동파의 주택문제 해결책이 사실상 급진 부르주아적 사고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투기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 한, 국가 주도든 사회 기금 방식이든 주택 공급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투기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므로, 토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75년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을 통해, 라살레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의 소부르주아적 한계와 이를 수용한 전독일노동자동맹(후일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발전)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파리 코뮌이 진압된 뒤 각국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고, 투항주의적 경향이 퍼지면서 내부 이론 논쟁은 점점 격화되었다. 결국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은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해산하게 된다. 1870년 9월 2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봉기를 일으켰고, 이에 따라 프랑스 제2제정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이후 제2제정에 참여했던 일부 의원들이 모여 프랑스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나, 혼란은 진정되지 않았다. 1871년 2월 8일, 프랑스는 국민의회 구성을 위해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 결과, 전국적으로 왕당파가 60%가 넘는 지지를 얻었지만 파리에서는 공화파가 우세를 점했다. 이어 2월 12일, 새로 조직된 국민의회가 프로이센에 불리하지 않은 강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민중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임시정부 수반 아돌프 티에르가 파리 수비대를 해산하려 하자, 3월 26일 파리 민중이 봉기하여 파리 코뮌을 수립하게 되었다. 당시 공화파는 크게 공산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었다. 급진적 자코뱅파 중 일부는 공산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폭력 혁명을 긍정하였고, 그 중심에는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있었다. 한편, 프루동은 집산주의에 기초한 자율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공화파의 일원으로 분류되었다. 코뮌 정부는 야간노동 금지, 교육의 세속화와 무상교육 실시, 공창제 폐지,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의 전횡 방지, 토지 재분배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1871년 5월 21일, 마크 마옹이 이끄는 정부군이 파리에 진입해 코뮌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에 협력한 공화파 세력은 대거 학살당했다. 1860년대 후반,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독일 제정은 1878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하여 이를 억누르려 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공동의 행동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결국 독일 사회민주노동당과 프랑스 노동당을 비롯한 여러 조직이 중심이 되어 제2인터내셔널이 1889년에 출범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형식적으로 국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지도 기구였으나, 실제로는 독일·프랑스·벨기에 등 서유럽의 이론적 흐름에 크게 종속되었으며, 초창기에는 특히 쥘 게드와 카를 카우츠기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1890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되자, 제2인터내셔널은 본격적으로 각국의 노동운동을 지도하며 급격한 성장을 이끌었다. 노동조합 조직 방식과 노동자 정당의 형성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보가 나타났다. 1891년 브뤼셀 대회에서는 군국주의 반대를 선언했고,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후 모로코 분장과 발칸 전쟁이 이어지자 이러한 원칙은 현실 속에서 힘을 잃었다. 각국의 사회주의 세력은 국제주의를 버리고 조국 방위를 우선시하게 되었으며, 이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경향과 맞물려 제2인터내셔널의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결국 노선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제2인터내셔널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 해체는 단기적으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가 독자적으로 혁명을 성취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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