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사회·정치적 공동체의 건설을 주장하는 사상이며, 동시에 이러한 사회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이론적·실천적 정치 운동을 의미한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서도 공산주의적 사상이 언급되었고, 이와 유사한 사고방식은 전근대 사회 속에서도 나타났다. 이후 서유럽 교회 사회에서는 만민 평등을 강조한 유토피아 사상과 '지상천국' 운동으로 구체화되었으나, 오늘날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주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을 지칭하며, 그 핵심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산주의가 현실 정치 속에서 본격적인 운동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19세기 유럽 산업화 시기였다. 급격한 산업 발전과 함께 나타난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산주의가 제시된 것이다. 공산주의의 대표적 상징은 낫과 망치이다. 이후 여러 사회주의 이론들과 나란히 발전하면서 공산주의는 하나의 방대한 종합 사상으로 확장되었다. 1871년 파리 코뮌 봉기를 통해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등장했으나, 그 존속 기간은 짧았다. 이어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10월 혁명을 일으켰고, 내전에서의 승리로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점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심으로 결집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동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공산주의권 국가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럽 여러 언어에서 쓰이는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꼬뮈니슴'(Communisme)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프랑스어 단어는 다시 라틴어 '콤무니스(Communis)에서 파생된 것이다. 콤무니스는 '공동체', '공유', '공공'을 의미한다. 공산주의라는 표현이 실제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말로, 프랑스의 사상가 뷔토르 뒤파이가 소설가 레티프 드 라 브르통느에게 보낸 서신에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한 사례였다. 이후 꼬뮈니슴이라는 용어는 영국과 독일을 거쳐 점차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인간의 도덕성과 형이상학적 본성을 토대로, 로고스(Logos)의 실천을 통해 지상에서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려는 인본주의적 정치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초기의 공산주의는 국가 소멸을 주장하는 사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1840년대 들어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점차 사용이 줄어들었고, 사회운동가들은 대신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다. 당시에도 공산주의는 경제적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를 평등하게 조직하려는 포괄적 정치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나, 사회주의는 주로 경제 영역에서의 평등을 강조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간주되었다. 공산주의가 정치적 용어로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회주의를 낡은 개념이라고 규정하고, 볼셰비키당의 명칭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바꾸면서부터였다. 이 시점 이후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명확히 구별되었으며,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기초로 한 보다 진보적 혁명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레닌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는 분명히 다른 사상이다."라고 선언한 뒤부터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 이해하였고, 이는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거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공산주의는 무신론과 유물론, 계급투쟁을 근간으로 한 반신론적 폭력 혁명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규정은 당시 유럽 사회가 강하게 기독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는 특수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는 대륙에서 존중받았지만, 공산주의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서술하였다. 실제로 샤를 푸리에나 로버트 오웬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종교계에서도 존중받는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종교적 시선이 훨씬 더 부정적이었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확립한 이후 공산주의는 대체로 유물론 철학을 바탕으로 한 역사 유물론에 근거한 사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사고나 주장은 이미 전근대 시대에도 존재하였다. 공산주의적 공동체와 그 실천을 중시한 사상들은 흔히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플라톤 철학에서 기인한 절대계와 현상계의 이원적 구도를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학적으로 객관적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특징을 보였다. 예를 들어, 6세기경 마니교의 한 분파였던 마즈다크교는 경제·문화·정치 전반에서 금욕주의를 철저히 실천하고, 계급제 폐지와 완전한 평등을 이상으로 삼았다. 동시에 선악 이원론과 존재론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이성적 자각과 자력을 통해 영혼의 단계가 상승하고 궁극적인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또, 마즈다크교는 종교적 의식과 의례를 모두 배격하고 오직 내적 수련만을 강조했기에 엄격주의적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마즈다크교는 아랍 지역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무장 봉기를 선동하였으나, 당시 주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는 이들을 '마교'라 낙인찍고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유럽에서도 16세기 초, 급진적 재세례파 신학자 토마스 뮌처가 공산주의적 발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고, 진정한 신앙은 인간 이성의 외적 발현을 통해 구현된다고 보았다. 이 같은 주장은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단으로 간주될 만큼 급진적이었다. 뮌처는 뮐하우젠에서 빈민 공동체인 '영원한 의회'를 수립하고, 마르틴 루터가 반대한 농민 전쟁을 지도하였다. 그는 무장 투쟁을 주장하면서 개신교·가톨릭·영주 세력 모두와 대립하였으며, 결국 프랑켈하우젠 전투에서 패배하고 참수형을 당했다. 처형 직전 그는 "모든 사람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아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