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시장 원리를 대폭 수용하고, 일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체제 안으로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가 점차 약화되었으며, 1989년에는 대부분의 계획기구가 해체되면서 사실상 자본주의적 혼합 경제 체제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경제난을 심화시켰고, 시장 원리 도입은 결국 소련 붕괴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계획 경제가 사회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이자 사회주의적 경제 질서를 성립시키는 보증 장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냉전이 끝난 이후 계획 경제는 다양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시장 경제에 견줄 만한 효율성을 갖추지 못한 구조로 간주되었고, 특히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 경제학자들은 계획 경제가 근본적으로 관료적 비효율을 극복할 수 없는 체계라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현재 대부분 국가의 정책 기조에서는 배제된 원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시장 경제의 결함이 두드러지자 일부 대안 경제 사상가들은 계획 경제의 원리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새로운 경제 체제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계획 경제가 지니는 구체적 내용은 가격 통제, 강제고지의 원리, 생산과 소비의 직접적 조정, 중앙계획기구에 의한 경제 운영, 그리고 투자 통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 가운데 계획 경제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기준은 중앙계획기구의 존재이며, 나머지 특징들은 지도주의적 통제 경제 체제 속에서도 실행될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속성을 통해 볼 때, 계획 경제의 실현을 곧 사회주의적 국가 권력의 존재를 필수적으로 전제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제 경제라는 범주 안에서 자본주의 체제 역시 일정 부분 관리와 규제를 받을 수 있으나, 전면적인 계획과 통제를 수반하는 계획 경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원리와 상충하기 때문에 양자가 동일한 구조 안에서 동시에 운용되기는 어렵다. 다만 냉전 이후 새롭게 제기된 탈집중화 이론은 자본주의적 체제 안에서도 계획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수용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계획 경제 이론은 본래 경제 운영에서 가격 통제를 핵심 수단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소련 정부가 농축산물 가격의 급격한 폭등을 경험한 이후, 가격 통제는 중요한 정책 기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격 통제는 여러 분야에 적용되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농민이 농산물을 국가에 납품할 때 유상공출제를 바탕으로 국가가 지정한 가격에 따라 거래가 이루어졌다. 도시에서는 국가 주도의 공업 생산품에 대해 전반적인 가격 규제가 시행되었다. 부동산 영역에서도 가격 통제가 시도되었는데, 토지 가격이나 건물 가격은 물론 임대료의 수준까지 포함되었다. 다만 소련의 경우 토지와 건물은 국가 소유로 간주되었고, 주택 거래 역시 사실상 거주권의 이전이라는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임대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한 몇몇 공산국가에서는 토지, 건물, 임대료를 국가가 직접 규제하는 형태의 정책이 도입되었다. '감제고지'라는 개념은 1922년 러시아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경제 지도의 방식을 설명하며 비유적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이는 생산력 이론을 토대로 한 공산당 견제 운영의 기본 원칙을 지칭하며, 간단히 말해 '생산력 발전 지도'로 요약될 수 있다. 레닌은 내전 종결 이후 소련의 산업 수준이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음을 실감하였다. 따라서 그는 생산력 발전을 위한 '본원적 축적'을 혁명적 정당을 통해 달성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이 바로 감제고지였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이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실천하기 위한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었다. 레닌 집권기에 시행된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경제정책(NEP)을 들 수 있다. 이는 농업 부문에서 본원적 축적을 추진하려는 초기 시도로 평가된다. 레닌 사후, 좌익반대파에 속했던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1886-1937)는 저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감제고지의 필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그는 당시의 취약한 농업 기반을 무시한 채 급격한 중공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스탈린을 비롯한 다수의 볼셰비키로부터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농민 착취를 통한 본줭적 축적을 강조한 그의 입장은 스탈린 계파에 의해 혹독히 공격당했다. 1930년대 중반 농업 집산화가 완료되면서, 스탈린은 감제고지 이론을 토대로 소련 사회주의 건설을 완성했다고 선언하였고, 1936년 개헌을 통해 본원적 축적이 달성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현대적 사례로는 덩샤오핑 이론을 들 수 있다. 그는 중국을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규정하면서, 본원적 축적을 공산당 지도하에 추진해야 한다는 생산력 발전 노선을 제시하였다. 비록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일부 시장 원리를 도입했으나, 감제고지 원칙은 유지되었기에 중국의 핵심 산업들은 여전히 당의 지침 아래 국가개발기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감제고지 원칙의 적용은 각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마다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예컨대 구소련의 경우 중국보다 훨씬 강력한 계획 경제와 통제주의 정책을 시행한 바 있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다니엘 예르긴은 1998년 저서 'The Commanding Heights'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누적된 위험을 혼합 경제 방식으로 극복하지 못할 경우 감제고지 원칙을 내세우는 정치 세력이 부상하여 자본주의 체제가 종식될 가능성을 제기하였다.